[연재⑰내남편 이승만] 아들사랑 지극한 한국 시어머니, 평온하고 행복한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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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⑰내남편 이승만] 아들사랑 지극한 한국 시어머니, 평온하고 행복한 말년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4.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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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외롭게 돌아가신 남편 생각하며 평온한 삶 과분하게 여겨
아들 부부와 두 손자와 성묘를 갈 때 행복하고 자랑스러워 해
아들 인수 씨와 함께 한 프란체스카 여사. 사진=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아들 인수 씨와 함께 한 프란체스카 여사. 사진=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프란체스카는 집에 선물이 들어오면 그냥 두었다가 선물 보낼 일이 있으면 그걸 다시 이용했다. 그녀는 틈만 나면 해진 옷을 기웠다. 경무대 시절 그녀는 천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에 헌 양말을 넣어 통통하게 만든 구두 속주머니를 만들어 미국 대사와 미국 상공회의소 부인들에게 선물했다. 

구두 모양이 변하지 않도록 구두에 끼워놓으라는 당부와 함께 선물을 하면서 고아와 전쟁미망인들을 도와줄 물품을 요청했던 것이다. 재봉틀과 각종 악기를 지원받아 전쟁미망인과 고아원에 전달했다. 프란체스카는 전쟁 중에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고아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는데 나중에 고아 중에 한 명이 이화장을 찾아온 일도 있었다.
 
선물을 싼 끈도 모았다가 엮어서 찻잔 받침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이런 알뜰한 유품들은 현재 이화장에 전시되어 있다.
  
조혜자 씨는 프란체스카를 완전한 한국 시어머니라고 말한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언제나 아들 앞으로 밀어주었으며 겨울이면 남편의 신발을 따뜻하게 해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는 마흔이 된 아들 인수를 미국으로 유학보내면서 속옷에 주머니를 달아 달러 몇 장을 다려서 넣어주었다. 

1973년에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이 가스레인지를 선물하자 “아들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말라”고 해 몇 년 동안 석유곤로를 사용했다. 김옥길 총장이 자주 찾아와 말벗이 되어주었는데, 조 씨는 어머니에게 김 총장의 타계 소식을 끝내 알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궁금해 할 때마다 “몸이 아파서 못 온다”고 둘러댔고 프란체스카는 “아프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근검절약하기로 소문난 프란체스카는 1974년 8월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을 TV로 지켜본 뒤 “내가 죽거든 꽃을 사용하지 말아라.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비싼가.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훨씬 낫다”고 당부했다.
 
프란체스카는 틈만 나면 며느리에게 유언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대개 그것은 근검절약과 관계된 것이었다. 조혜자 씨는 시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은 자신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독립된 것이 아니니 내핍생활을 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죠.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사셨어요.”
 
프란체스카는 말년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보냈다. 건강도 좋아 귀국할 때보다 살이 찌고 안경을 안 끼고 책을 읽을 정도였다. 매일 코리아 헤럴드를 비롯한 영자신문과 한국 TV, AFKN을 시청했다. 어지간한 한국말은 할 줄 알아 집안에서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81회 생일 때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녀는 당시 근황을 이렇게 말했다.
 
“고향에 있는 언니에게 가끔 카드가 와요. 언니를 생각할 때마다 더욱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절감해요.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은 게 바로 우리나라니까요. 늙어서도 축복받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끝까지 이곳에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가족제도야말로 세계 으뜸가는 자랑거리죠.”
 
그녀는 또 《대통령의 건강》에 이화장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기술했다.
 
“하와이에서 외롭게 돌아가신 남편을 생각하면 내게 과분하게만 느껴진다.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가 노후에 한국에서 이토록 행복한 내 모습을 보신다면 그 당시 한국 노신사와의 결혼을 그토록 반대했던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특히 손자들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고 피력했다. 특히 첫 손자인 병구의 출생소식을 빈에서 듣고 ‘당장 남편 산소에 달려가 우리도 손자가 생겼습니다 하고 힘껏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책에 기록했다. 프란체스카는 손자들이 태어났을 때 특별히 족보의 돌림자인 丙(병)을 따서 짓도록 당부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기록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셔서 너희들 자라는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고 사랑하셨겠니? 나 혼자 살아서 손자 재미 보는 것이 송구스런 느낌마저 든다. 왜 그토록 대통령이 아들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노후에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들 부부와 두 손자와 성묘를 갈 때면 참으로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손자며느리까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조혜자 씨는 어머니가 딱 한 번 양아들 강석을 입에 올린 적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쯤에 강석이 산소에 꽃 좀 갖다놓으라고 당부하시더군요. 한번도 강석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일평생 마음속에 품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날 이후로 다시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1990년 90회 생일 축하연이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렸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생일잔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국가유공자 가족들을 초청하는 자리로 대신한 축하연이었다.(계속)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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